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경래의 난 (문단 편집) === 전술적 한계 === 전술적으로도 홍경래의 난은 문제점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난을 일으킬 때 병력이 1000명이었고 정주성에서 농성할때 5000명일 정도로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너무 적었다는 것인데, 이 적은 병력을 잘게 쪼개기까지 해서 기습으로 인한 초반의 우세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홍경래의 난은 1812년 1월 31일(양력)시작 당시 약 1천여명의 병력이 전부였다. 이후 여러 고을을 함락하면서 떠돌아다니던 유민과 노비, 천민들이 합세하고, 병부를 통해 양민들을 징발하면서 병력의 규모가 5천여명까지 늘었으나, 처음의 병력 1천여명을 제외하면 사실상 군사 훈련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머릿수 채우기에 불과했다. 거병 당시 홍경래는 본대를 맡아 안주로 진군하고, 김창시·우군칙·이제초는 북진군을 맡아 서북쪽으로 진군, 김사용은 부원수군을 맡아 의주를, 홍총각은 남진군을 맡아 박천으로 진군했다. 즉 홍경래의 본대와 홍총각의 남진군은 둘로 나뉘어 남쪽으로 진군. 김창시의 북진군과 김사용의 북원수군은 둘로 나뉘어 북쪽으로 진군한 것이다. 이 전략은 초반에는 주효하여 본대는 2월 2일에 가산, 박천, 태천을 큰 저항없이 점령했고, 북진군 역시 곽산, 정주를 단기간에 점령하고 1812년 2월 15일에는 용천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점점 점령하는 고을이 늘어나고, 그 고을마다 최소한의 병력을 주둔시켜야 했기에 반군의 수는 전과가 오를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반군이 점령한 대읍[* 大邑, 규모있는 도시]만 해도 11개인데, 이런 대읍마다 최소 50명만 남겨둔다면 이미 절반 이상인 550명이다. 여기에 대읍보다 작은 규모의 마을은 훨씬 더 많을 것이기에 반군의 병력. 특히, 오랫동안 홍경래가 직접 조련했던 정예병은 갈수록 줄어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반군 입장에서 이러한 고을들을 그대로 놔둘 수도 없는 것이 이들은 단순히 약탈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를 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반드시 점령한 고을은 통치해야만 했다[* 실제로 반군은 각 고을마다 유진장(留陣將)이란 수령을 임명했다.]. 이러한 사실은 평서지방 최대의 병력 집결지이자 의주에 버금가는 안주성[* 조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성으로 평안병사(平安兵使)의 본영이 있는 곳이다. 오늘날로 치면 군사령부가 있는 곳이라 보면 된다.]으로 진격할 수록 전력이라고는 정예 1천 + 오합지졸 4천명 징병군으로 구성된 반군의 패배와 퇴각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1월 31일 거병 이후 2월 7일까지 반군은 한 차례의 패배도 없이 파죽지세로 고을을 함락시켰으나 본대와 남진군은 남쪽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반대로 부원수군과 북진군은 북쪽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병력이 점점 분산되면서 전력이 약해지더니 2월 8일 경에는 안주성을 목전에 두고 영변에서 관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여기서 반군의 지휘부는 흔들리게 되는데, 진격에 차질이 생기게 되자 홍경래의 본대는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장수 김대린과 안주성 및 인근 읍락의 포섭된 하급 군관과 아전들은 한양과 평양의 지원군이 안주에 도달하기 전에 당장 안주성을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했고, 반대로 참모들은 안주성은 방비가 매우 튼튼하니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외곽의 영변, 태천과 같은 지역부터 함락시킨 다음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경래는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안주를 공격하지 않고 주변 지역부터 공격하게 했는데,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 선택이 패배를 이끌었다. 2월 8일 경의 안주성은 병력이 부족하고 반군의 기세와 힘이 과장되어 전해진 탓에 사기도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군이 안주성을 공격하지 않고 외곽을 공격하면서 재정비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게다가 홍경래의 결정에 반발한 김대린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홍경래가 부상을 입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반군의 지휘체계까지 흔들리게 되었다. 1월 31일 반란군의 거병 사실이 2월 2일에 평양까지 전달되자 평안감사 이만수(李晩秀)는 소식을 한양으로 알리는 한편, 그 즉시 평양과 순안의 거의 모든 갑사와 병사들을 안주로 급파시키면서 동시에 주변의 읍락들에게도 파발을 보내 추가로 지원할 병사 동원령을 내렸다. 또한 지역의 유생과 양반들에게 의병을 조직하게 하여 이 의병들로 하여금 정규군 대다수가 파견되어 공백이 생긴 평양 인근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이처럼 이만수의 긴급한 조치와 반군이 안주성 공략을 주저한 탓에 안주성은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만수는 이후 송림리 전투에서 패퇴하는 적을 쫓아 섬멸하지 않았다고 탄핵을 받아 파면됐다. 이만수 입장에선 매우 억울한 것이 송림리 전투는 안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반군이 모이는 것을 보고 관군이 선제타격한 것으로 공격자인 관군이 병력수에서 더 열세였다. 기습의 이점과 때 맞춰 도착한 관군 지원군 덕에 겨우 이긴 전투였는데 이 전투에서 적을 섬멸하지 않았다하여 탄핵된 것.]. 또한 곽산군수 이영식 등 초반에 점령당한 고을의 문무관들과 군관들, 병사들이 안주성으로 합류하면서 안주성의 방비는 더욱 튼튼해졌다. 한편 홍경래의 본대는 영변과 태천을 공략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지금이라도 안주성을 공격해야한다는 의견으로 안주성 인근 송림리에 진을 쳤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평안병마절도사 이해우(李海愚)와 목사 조종영(趙鍾永)이 2월 11일, 1천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서 송림리의 반군을 공격했다. 병력수는 홍경래군이 더 많았으나, 의외의 기습을 당한데다가 앞서 말한대로 정예병의 수가 계속 줄어든 홍경래군의 뒷심 부족으로 점차 밀리게 되었고 이후 곽산 군수 이영식이 원군을 이끌고 도착하자 결국 홍경래군은 대패하여 퇴각하고 만다. 전술적 한계의 두번째는 첫번째와 이어지는 것으로 홍경래가 기습초반의 승승장구를 통해 정규군인 조선군의 수준을 '''오합지졸이라고 너무 얕본 것'''이다. 순조 때의 조선이 수렴청정과 세도정치로 인해 병에 든 것은 맞지만, 그래도 국가 체계는 유지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명군으로 평가받는 정조가 바로 전대의 국왕이었다. 또한 아무리 나라가 막장이 되어도 기득권층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최후의 방패인 군사력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근현대사에서 반군이 정부를 무너뜨리고 국가지도 체계를 새로 만든 경우는 있는편이지만 대다수가 미국/소련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은밀한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며 반군 스스로가 정부를 무너뜨린 경우는 정부와 정부군이 너무 막장이여서 민심을 전부 잃었을때 밖에 없을때이다. 이 경우가 아프리카 일대에서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대개 정부군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유지하고 공격헬기나 전차들을 수입을 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정부군이 반군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게 기본적인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북한]]과 아프리카 일대의 군벌들이 있다.] 근대사에서 조선군이 [[병인양요|프랑스군]]이나 일본군에 속절 없이 당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기에 무시하기 쉬우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규군들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고, 내부적인 반란을 진압하는 것과는 아예 결이 다른 소리다. [* 신미양요와 병인양요의 전황을 보면 조선군이 취한 전술은 당시 조선이 취할수 있는 최고의 전술이었다. 다만 전술로 극복하기 힘들정도의 화력차가 났을 뿐이다.] 시기에 따라서 다르지만 수도인 한양에만 해도 훈련도감이 약 6천여명, 금위영 2천여명, 어영청 2천여명, 호위청 1천여명 등 1만 여명의 병력이 존재했고, 경기도 방어를 담당하는 총융청, 한양 인근의 주요 도시인 광주·수원·강화·개성에는 각각 수어청, 총리영, 진무영, 관리영이라는 방어 부대가 따로 있었다. 물론 이때쯤 되면 방군수포라 하여 군적에는 이름만 올려놓고 군포만 납부하는, 군사훈련 한 번도 안 받아본 민간인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아무리 깎아 들어도 한양과 수도권 인근에만 최소 1만 여명의 직업 군인들이 상주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다 수도권 병력보다 질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숫자는 오히려 더 많은 삼남 지방의 병력들. 난리가 나면 지방의 향림과 사림 등 양반층이 주도해서 모집하는 의병들까지 고려하면 홍경래의 반군과 그들이 상대해야 할 관군과의 격차는 거의 1대 100 이상으로 벌어진다. 더군다나 유교적 질서가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당시에 홍경래의 반군은 앞선 인조반정이나 중종반정처럼 군주를 바꾸자는 수준을 훌쩍 넘어서 왕조를 무너뜨리고 나라 자체를 갈아치워버리자는 [[역성혁명]]이었기에 여기에 동조해줄 기득권 세력은 전무했다. 처음 궐기한 서북 지방에서도 동조해줄 기득권은 이전부터 중앙정부의 차별과 무관심으로 인해 불만이 있던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홍경래의 반군이 한양은 근처에도 오지 못하고, 안주성조차 넘지 못하고 퇴각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송림리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단 한 번도 공세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며 남군은 정주성으로 쫓겨 들어갔고, 북군은 북군대로 의주성 함락에 실패하면서 군이 와해됐다. 이후 관군은 고사하고 허항의 의병군에게 쫓기면서 김창시 등 핵심 수뇌부까지 전사하게 된다. 이러한 전략적 실패들을 한 밑바탕으로는 홍경래와 그 수뇌부들의 태생적 한계가 많이 거론된다. 홍경래를 포함하여 우군칙, 김사용, 홍총각, 이희저, 김창시 등 수뇌부들 중에선 군사를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비록 홍경래의 카리스마가 대단하고, 홍총각과 김사용의 무예가 대단하다고 해도 개인의 무력이 뛰어난 것이지 군사를 잘 지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홍경래와 우군칙은 수많은 병서를 읽어 온갖 병법에 통달하였다고 하지만 중요한 실전 경험이 없이 병서만 많이 읽은 이들은 전투에서 독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일례로 삼국지에도 언급되는 [[마속]]이 대표적인 인물로 병서를 통달하고 총명해 공명의 총애를 받은 인재이지만 실전이 부족해 부관 왕평을 무시하고 산에 진을 쳤다가 승승장구 중인 북벌을 망친 케이스처럼 홍경래도 이론만 최강일뿐 실전에는 무능했다.] 실제로 다복동에서 거병 이후 각 고을을 점령하면서 고을에 있던 무관들이 반군에 가담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은 더 부각됐다. 상단에 서술된 김대린이 이러한 무관 출신인데, 무관들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지금 공격을 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음에도 우군칙이나 김사용 같이 글로만 병서를 배운 이들이 반발하니 갈등이 심해졌고, 결국 내분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